한국의 기본소득 운동

▲ 안효상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이사장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부소장

1. 들어가는 말

2022년 대통령 선거 이후 한국 사회가 빠르게 퇴행하면서 “한국은 보편적 기본소득을 실시하는 첫 번째 나라가 될 것인가?”라는 질문이 무색해졌다.

그럼에도 기본소득을 요청하는 시대적 배경이 더 짙어진다고 할 때 한국에서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기본소득 의제가 다시 부상하는 일은 아주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기본소득 운동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성장하면서 기본소득이 정치적, 사회적으로 중심 의제가 될 수 있었는가를 살펴보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최근 10여 년 사이에 기본소득이 전 세계적으로 의미 있는 정책이자 가치로 부상하긴 했지만 기본소득은 현대 사회의 지배적인 노동-소유 패러다임과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는 낯선 아이디어이며 그 정당성 및 필요성에 대한 논구와 설득력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실현가능성이라는 질문에 부딪혀왔다.

따라서 기본소득의 정치적 실현을 위한 조건 및 전략에 관한 논의는 기본소득을 둘러싼 논의에서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며 이 논의를 위한 토대는 여러 나라와 지역의 경험이다(Caputo, 2012; 김교성, 이지은, 2017).

이 글은 한국에서 기본소득 운동의 부상 그리고 기본소득의 정치적 실현가능성을 한국 진보 운동의 변화, 한국 복지국가의 전환, 2010년대의 정치적 변동 속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한국 진보 운동의 변화를 중심축으로 기본소득 운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때 진보 운동의 변화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이념적 변화이며, 다른 하나는 정치 전략의 변화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던 한국의 진보 운동 가운데 일부가 21세기 들어 (생태적)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한편 비개혁주의적 개혁 정치(앙드레 고르츠)를 전략으로 삼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기본소득이 주요한 요소이자 이런 변화를 추동한 힘이었다.1

우선 2장에서는 한국 진보 운동의 일부가 기본소득과 어떻게 만났고, 이를 의미 있게 수용했는지를 살펴본다. 이때 장기적으로는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이, 단기적으로는 개발주의 국가에서 ‘자유주의 복지국가’로의 전환이 배경을 이룬다.

3장에서는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의 활동을 중심으로 기본소득 의제의 확산 과정을 다룬다. 2009년에 창립된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는 기본소득의 정당성부터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 모델의 개발까지 단기간에 기본소득에 관한 논의를 풍부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기본소득의 실현을 위한 정치적 채널을 모색하고 구축하려 했다.

이 속에서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는 명실상부하게 기본소득 의제 확산과 실현의 추동력이었다. 4장에서는 2016년 이후 한국에서 구현된 기본소득 정책 혹은 기본소득 유사 정책이 어떻게 실시되었고, 장기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본다.

맺음말에 해당하는 5장에서는 2022년 대통령 선거 이후 변화된 정치 정세 속에서 기본소득의 의미 그리고 장래의 전망을 살펴본다.

이 글은 기본적으로 연대기적 구성을 취하면서도 그때그때마다 적절한 평가를 할 것인데, 이때 관점은 규범적 성찰과 전략적 판단이다.

규범적 성찰이란 “이미 주어진 것에 순응해야 한다는 주장을 거부하며, 비판적 관점에서 사태를 설명”하는 것이며(Young, 1990), 전략적 판단은 기본소득을 실현할 수 있는 경로를 탐색하고, 그 전 과정을 관리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관점에서 사태를 바라보는 것이다.2

2. 조우(遭遇)

1) 한국 진보 운동의 변화와 기본소득

1987년에 벌어진 민주주의로의 이행 및 뒤이은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속에서 한국의 진보 운동은 구별되면서도 중첩된 두 가지 모색의 길에 나선다. 하나는 제도화된 민주주의 체제 내에서 반공 보수주의 및 자유주의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정치 세력을 건설하는 일이다. ‘노동자, 민중의 독자 정치 세력화’라 불린 이 프로젝트는 오랫동안 반공 독재 체제 하에서 억압받았던 진보-좌파 운동의 정치적 부활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다른 하나는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속에서 기존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및 혁명 전략에 대한 대안을 찾는 일이었다. 소련을 비롯한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은 가치이자 이념형으로서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자체에 대한 회의는 말할 것도 없고, 도시 봉기나 해방구 무장투쟁 같은 20세기 혁명 노선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품게 했다. 물론 분단 상황,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 제도화된 민주주의 등도 혁명 노선을 재검토하게 된 주요한 배경이다.3

독자적인 정치 세력의 건설이라는 과제는 1990년에 창당한 민중당의 실패 이후 좀 더 장기적인 과제가 되었다가,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10명의 의원을 배출하면서 하나의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 민주노동당은 이념적으로는 사회(민주)주의와 민족 해방에, 조직적으로 노동조합 운동 및 주로 민족 해방 계열의 지역 운동에 근거했다. 민주노동당이 이 정도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조직적 기반 이외에 기존의 거대 양당이 아닌 진보적인 제3세력에 대한 대중의 열망, ‘무상 의료, 무상 교육’을 내세운 복지 정치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진보 운동의 주요한 두 세력인 PD와 NL의 분파 갈등, 신자유주의의 지배 하에서 벌어진 노동자들의 분화로 인한 대표성의 약화 및 북한 추종이라는 시대착오성, 거대 양당의 탄력적인 변신, 소선거구제 등의 정치 제도 등이 겹치면서 점점 소수화, 주변화되었다. 이후 민주노동당 및 기타 급진 좌파 세력은 통합과 분화를 반복했고, 현재는 녹색정의당, 진보당, 노동당 등 몇 개의 원내외 정당으로 병립하고 있다.4

당시 진보 운동의 주류가 만든 민주노동당과 별개로 좀 더 젊은 활동가들이 주축이 된 사회당도 노동자, 민중의 독자 정치 세력화라는 프로젝트의 일부로 등장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에 대학을 다녔던 이 그룹은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이라는 현실에 맞서 좀 더 고전적인 맑스주의에 기대는 한편 민주노동당을 배타적으로 지지한 민주노총 외부에서 정치적 기반을 확보하려 했다. 따라서 사회당은 새로운 사회운동과 주제, 즉 비정규-불안정 노동자 운동, 장애인 운동, 여성 운동, 환경 문제 등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정당 운동에 나섰다. 이런 경향은 이후 기본소득의 수용 및 확산에서 이 그룹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배경이 된다. 하지만 조직적, 정치적 기반이 취약했기 때문에 소수의 원외 정당에 머물게 된다(안효상, 2013).

한편 기존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및 혁명 전략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은 개인 및 집단마다 달랐는데, 스탈린주의의 고수부터 포스트맑스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의 수용까지 짧은 기간 내에 흡사 사상의 홍수를 겪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춘추전국 시대의 백가쟁명보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의 디아도코스의 시대에 더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더 이상 대타자는 존재하지 않으며, 저마다 고유하면서도 서로 겹치기도 하는 이념과 정책의 모자이크 시대가 도래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제도적이건 이념적이건 민주주의를 자기 이념의 밑바탕 혹은 지향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 마오주의, 주체사상 등은 표면적으로 주변화되고 소수화되었다.

기본소득이 한국의 진보 운동 일부에서 수용된 것은 이런 맥락 속에서였다. 독일에서 철학과 경제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곽노완은 2006-7년에 일련의 학술대회 발표문과 논문을 통해 ‘연기금 사회주의’와 기본소득을 소개했고, 이에 공감하는 일부 학자들과 사회운동가들이 생겼다. 이와 관련해서 이후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대표로 오랫동안 활동하게 될 강남훈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소비에트식 국가사회주의 체제는 민주성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했는데 효율성도 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 후 신자유주의가 닥쳤는데 그 역시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현존하는 경제적 대안이 다 사라졌다. 그러다가 2000년대 들어 곽노완 교수의 논문을 통해 독일에서 논의되는 기본소득을 알게 되었고 대안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백승호 외, 2019).

곽노완과 마찬가지로 독일에서 법학과 철학을 공부한 사회당의 금민도 ‘사회적 공화주의’의 관점에서 기본소득을 주요 정책으로 내세웠는데, 이는 두 가지 근거에서였다. 하나는 무상 의료와 무상 교육 등 민주노동당이 제기한 복지정치가 적절한 방향이긴 하지만 복지 선진국을 추격하는 방식은 곤란하고 새로운 복지를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진보 정치가 추상적 이념을 제시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중단기적인 정치적 목표 및 개혁 과제를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제출된 중단기적 정치적 목표는 신자유주의 종식 및 국민 주권의 회복을 위한 보편적 복지의 실현이었으며, 개혁적 과제 가운데 하나가 기본소득이었다(백승호 외, 2019; 금민, 2007).

이런 맥락에서 금민은 2007년 12월에 열린 대통령 선거에 사회당(당시 한국사회당) 후보로 출마했고, 기본소득을 제1 공약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당시 사회적 분위기는 보수 정당인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당선에서 알 수 있듯이 여전히 성장과 신자유주의적 경쟁이 지배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소수 정당 중의 소수 정당인 사회당의 영향력이 매우 적었기 때문에 금민의 기본소득 공약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하지만 곧바로 전 세계적인 금융 위기와 경제 위기가 다가왔고, 이때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진보적 대안을 찾는 사람들에게 기본소득은 일종의 집합신호 역할을 했다. 이때 기본소득은 단순한 하나의 정책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수탈 경제를 종식하고, 민주주의를 활성화하며, 포스트자본주의의 길을 여는 혁신적인 아이디어이자 가치였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2009년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를 창립했다(백승호 외, 2019).

2) 한국 복지국가의 빛과 그림자

1997년 외환 위기 속에서 탄생한 김대중 정부의 출범은 두 가지 점에서 역사적인 일이었다. 우선 정치적으로 볼 때 해방 이후 처음으로 민주적 선거에 의해 정권이 교체되는 일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한국에서도 제도화된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사회적으로 보면 개발국가 복지체제에서 새로운 복지 체제로 이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새로운 복지 체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논쟁적인 사안이지만5, 의료서비스의 보편성 제고, 근대적인 공공부조제도인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도입, 사회보험의 확대 등은 분명 이전과는 다른 복지 체제의 지향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윤홍식, 2019).

하지만 이렇게 변화된 한국 복지체제는 서로 얽혀 있는 두 가지 난점이 있었다. 하나는 1997년 외환 위기 이후에 특히 본격화된 금융화와 노동유연화, 기술 변동 속에서 양질의 전일제 일자리가 줄어들고, 대신 ‘비정규-불안정 노동’이라 부르는 일자리가 크게 늘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는 주지하다시피 역사적 복지국가의 기반을 흔드는 일인데, 이제 막 그러한 복지 체제를 갖추려고 하는 한국의 경우에는 그 방향성 자체가 문제시되는 일이었다. 특히 한국의 경우 김대중 정부 이후에도 재벌 대기업에 의존하는 수출주도형 성장 체제가 지속되었는데, 과거와 다른 점은 고용유발 효과가 떨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국내 경제와의 연관성 자체가 약화되었다는 문제점이 나타났다. 다른 하나는 사회보험 중심의 복지 확대가 가진 한계이다. 이는 개발국가의 유산이자 역사적 복지국가의 전제, 즉 (완전) 고용을 가정하고 또 추구한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바람의 방향이 변화하고 있는 시점에서 사회보험 중심의 복지 확대는 사회보험 가입자와 미가입자 사이의 불평등, 특히 이른바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불안정 노동자 사이의 불평등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그 결과 공공복지가 분명 확대되었음에도 불평등과 빈곤은 줄어들기는커녕 경우에 따라 더 커졌다. 크게 보면 복지국가의 변화 및 확대 속에서 나타난 ‘역진적 선별성’의 강화가 이후 한국 복지 정치의 배경을 이룬다(윤홍식 2019, 김교성 외, 2018).

그럼에도 앞서 말한 것처럼 복지 정치는 한국 진보 정치의 준거점이자 방향성이 되었다. 1990년대 한국의 진보 운동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및 혁명 전략의 수정을 요구받았고, 그 결과가 제도화된 민주주의 체제 내의 참여 및 개혁 정치였다. 그리고 이때 주요한 개혁 과제 가운데 하나가 (보편적) 복지국가의 건설이었다. 물론 이는 김대중 정부의 복지체제 확대에 자극받은 측면도 있다. 그리고 그 출발점이 앞서 말한 민주노동당의 무상 의료, 무상 교육이라는 정책이었다. 이 속에서 보편적 복지에 대한 대중의 요구도 모습을 갖추게 된다. 선거를 통한 정권 교체의 경험 및 시민권에 기초한 복지 확대는 사람들로 하여금 보편적 복지를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게 했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 2010-11년의 무상 급식 논쟁이다.

무상 급식은 무상 교육의 일환으로 이미 제기된 바 있지만 한국 복지 정치에서 의미 있는 쟁점이 된 것은 2010년의 지방선거에서였다. 경기도 교육감 후보로 나선 김상곤은 무상 급식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는데, 보수당인 한나라당 계열의 후보들이 이에 크게 반대하면서 전국적인 논쟁으로 커졌다. 교육감에 당선된 김상곤 그리고 서울시 교육감에 당선된 진보 계열의 곽노현 모두 무상 급식을 하겠다고 나서자, 한나라당 서울시장인 오세훈이 강력히 반대하면서 2011년 8월 주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했다. 주민투표 결과 최종 투표율이 투표함을 개봉할 수 있는 33.3퍼센트에 미치지 못하는 25.7퍼센트가 되어 주민투표 자체가 무산되었고, 이에 오세훈 서울시장은 시장직에서 물러나버렸다. 이후 벌어진 보궐선거에서 민주당 계열의 박원순 시장이 당선되었고, 서울에서도 무상 급식이 실시되었다. 현재 거의 대부분의 지방자치단체에서 초등학생과 중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무상급식이 실시되고 있다(김교성 외, 2018).

무상 급식 논쟁이 한국 복지 정치에 던진 함의는 매우 컸다. 우선 복지 정책 자체가 한국 정치에서 주요한 의제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향후 기초노령연금을 비롯해 여러 복지 정책이 주요한 정치 국면에서 주요한 의제가 되게 하는 출발점이었다. 다음으로 선별주의 대 보편주의라는 프레임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무상 급식을 반대하는 측에서는 저소득층에게만 선별적으로 무상 급식을 하겠다고 주장함으로써 이른바 잔여적 복지의 관점을 드러냈다면, 무상 급식을 찬성하는 측에서는 복지를 모두의 권리, 즉 보편적인 것으로 제시했다. 이런 선별주의 대 보편주의는 향후 한국 복지 정치의 기본적인 프레임이 된다.

3) 새로운 진보 운동에서 기본소득의 의미

제도화된 민주주의 속에서 그리고 복지 체제의 변화 속에서 진보 운동이 복지 정치를 준거점이자 방향성으로 잡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보편적 복지국가를 비개혁적 개혁 정치가 추구해야 할 방향성이라고 보더라도 후발주자로서 선진 복지국가를 따라가는 방식으로 복지 정치가 작동할 수 있는가가 문제이다. 이런 문제에 관한 하나의 대답이 기본소득이었다.

우선 역사적 복지국가에 대한 비판이자 복지국가의 위기에 대한 대안으로 기본소득이 이미 서구에서 떠오른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복지국가 추격 발전 모델이 아닌 다른 경로를 모색하는 사람들에게 쉽게 수용될 수 있었다. 특히 기본소득의 보편성은 한국의 선별주의 대 보편주의 논쟁을 감안할 때 매우 주요한 요소였다.

두 번째로 혁명 정치의 사실상의 폐기 속에서 기본소득 의제는 비개혁적 개혁 정치의 주요한 요소로 간주되었다. 우선 시민 혹은 모두의 권리로서의 기본소득이 민주주의를 활성화할 수 있는 촉매가 될 수 있다는 판단이다. 이는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한데, 하나는 기본소득이 모두에게 물질적 기반을 제공함으로써 정치적 참여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기본소득의 재원을 무엇으로 삼든 그것이 공동의 부라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소속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기본소득의 (재)분배 효과이다. 초기부터 강남훈 등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의 주요 구성원들은 기본소득의 (재)분배 효과를 측정했는데, 어떤 방식으로 재원을 마련한다 하더라도 순수혜자가 7-80퍼센트 이상 되었다. 이는 직접적으로 불평등을 완화하며, 사회 통합에 기여할 것이다.

세 번째로 기본소득은 진보 정치를 갱신할 수 있는 더 심원한 전망이 있다. 이는 한국의 기본소득 지지자들이 기본소득의 정당성과 원천을 공유부(common wealth) 혹은 커먼즈(commons)에서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공유부 혹은 커먼즈라는 문제틀은 우선 사적 소유의 성립 조건이 공유라는 것에 출발하며, 사적 소유가 성립한 이후에도 그 바탕에는 공유가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현대 사회에서도 공유부 혹은 공유지는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와 자본에 의해 계속해서 포획되고 강탈당하고 있으며, 이를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다(Paine, 1969, Barnes, 2014; Standing, 2019; 금민, 2020; 곽노완, 2010; 2020; 이지수 외, 2023). 이런 문제틀은 19세기와 20세기의 프롤레타리아트 공산주의와 달리 새로운 코뮨주의를 지향하는 것이다. 새로운 코뮨주의는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무산자이자 가치증식의 담지자로 설정된 노동자계급이 아니라 공유자(commoner)를 주체로 본다는 점에서 그리고 20세기 공산주의가 국가 소유로 미끄러지면서 국가 권력의 강화로 퇴행한 것과 달리 원천적 공유 및 다층적인 공유지의 연합체인 다원적 체제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새롭다.

3. 산종(散種)

1)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2000년대 초반 기본소득을 소개하는 연구나 글이 나오긴 했지만, 진보 운동에서 기본소득을 지향해야 할 가치이자 정책으로 제시한 것은 강남훈과 곽노완이 참여한 민주노총 프로젝트팀이 출간한 소책자 『즉각적이며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을 위하여』(2009년 1월)를 통해서였다. 이후 더 많은 연구자와 활동가 들이 참여하여 1년 후인 2010년 1월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을 뒤집어라』가 나왔다. 기본소득의 정당성과 의미, 노동해방과 기본소득, 기본소득의 경제적 효과, 기본소득과 소득재분배 문제, 기본소득과 기본복지, 기본소득과 여성 등 여러 주제를 다룬 이 책은 기본소득을 “노동해방의 새로운 길”이자 “진보의 새로운 대안”이라는 점을 천명했다는 의미가 있다(민주노총 정책연구원, 2010). 그 사이에 기본소득을 좀 더 심도있게 연구하고 전파하기 위해 조직을 만들자는 제안이 있었고, 2009년 6월말 ‘기본소득네트워크’라는 이름의 조직이 만들어졌다. 기본소득네트워크가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로 이름을 바꾼 것은 국제적인 교류를 시작한 2010년의 일이다(백승호, 2019).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가 만들어지고 약 반 년 후인 2010년 1월말에 서울에서 열린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는 여러모로 의미가 있는 행사였다. 우선 한국 내에서 진보 진영의 여러 단체와 개인 들이 참여해서 기본소득이 이미 관심을 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사회당과 진보신당 등 진보 정당, 민주노총, 진보적인 교수와 연구자, 사회운동가 들이 대거 참여해서 기본소득을 중심으로 노동, 복지, 정치 등 여러 쟁점을 다루었다. 다음으로 국제적으로 저명한 기본소득 주창자들이 참여했다.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 창립 멤버인 필리프 판 파레이스, 브라질 상원의원인 에두아르두 수플리시, 당시 기본소득일본네트워크 코디네이터인 야마모리 도루 교수, 독일 좌파당의 로날트 블라슈케 등이 참여해서 한국 기본소득 운동을 축하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각국의 경험에 관한 발표를 했다(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 조직위원회, 2010). 이후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는 2010년 7월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열린 제13차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대회에서 17번째 가입 조직으로 승인을 받았다.

같은 시기에 진보적인 사회복지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기본소득에 관한 관심이 퍼졌다. 2000년대 중반 한국 복지국가의 방향성을 둘러싼 논의 속에서 “진보적 사회복지 대안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이들은 기본소득과 사회적 지분 급여(stakeholder grant)을 적극적으로 검토하면서 기본소득을 대안으로 수용하게 된다. 기본소득으로 가는 문턱에서 이들은 에릭 올린 라이트가 주관한 ‘리얼 유토피아 프로젝트’(The Real Utopias Project)의 일환으로 출판된 『분배의 재구성』을 2010년 1월에 번역 출판한다. 이후 사회복지 연구자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을 거치면서 2018년에는 학문적이면서도 포괄적인 『기본소득이 온다』를 출판하게 된다.

이후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는 세 가지 활동을 벌였다. 첫째, 기본소득에 관한 연구, 특히 기본소득의 정당성에 관한 논구 및 한국 현실에서 구현할 수 있는 모델의 개발, 둘째, 기본소득에 관한 대중 교육, 셋째, 기본소득을 실현할 수 있는 정치적 채널의 모색 등이 그것이다.

경제학자 강남훈 등은 모든 국민에게 조세에 기초하여 1인당 연 300만 원을 지급하는 모델, 각기 재원을 달리하는 토지배당, 환경배당, 시민배당 등으로 구성된 모델(1인당 연 360만 원) 등 여러 모델을 개발했다(강남훈, 2010; 2014; 정원호 외, 2016).6 곽노완과 금민은 각각 새로운 코뮨주의에 대한 전망으로서의 기본소득과 소유권의 관점에서 기본소득을 정당화할 수 있는 논의를 전개했다(곽노완, 2017; 금민, 2010). 이외에 기존 복지국가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과 대안으로서의 기본소득 등에 관한 논의, 다른 나라의 기본소득 논의에 관한 소개도 있었다(김원태 외, 2014; 강남훈 외, 2014).

기본소득에 관한 대중 교육은 입문용 단행본과 선전용 소책자 발간(최광은, 2011; 권문석, 김성일, 2012) 그리고 ‘기본소득 학교’라는 대중 강좌를 통해 이루어졌다. 기본소득 학교는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세 차례 진행되었고, 기본소득의 여러 이론, 재정 모델, 대안 사회의 전망, 기본소득의 여러 효과 등을 다루었다.7

기본소득을 정치적 의제로 만들고, 더 나아가 실현할 수 있는 정치적 채널의 모색은 크게 두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진보 정치 세력 일부의 재구성을 통한 것이었다. 이미 기본소득을 강령으로 채택하고 있던 원외정당인 사회당과 민주노동당에서 갈라져 나온 진보신당은 2012년 총선을 앞둔 2012년 3월 진보신당이라는 이름으로 합당했고, 기본소득을 주요 정책의 하나로 채택했다. 진보신당은 2012년 총선 그리고 노동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나선 2016년 총선에서 모두 기본소득을 주요 공약으로 제시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2016년 공약의 경우 기본소득과 노동시간 단축 및 최저임금 인상을 결합한 정책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이는 앙드레 고르츠의 입론을 연상시키지만, 당대의 맥락에서 보자면 새로운 노동자 운동, 즉 비정규-불안정 노동자 운동과 기본소득 의제를 결합하려는 시도였다.8 하지만 여전히 노동중심성을 내세우는 세력이 힘을 발휘하고 있었고, 2019년 기본소득 주창자들이 당을 떠나 기본소득당이라는 단일 쟁점 정당을 만들었다.

정치적 채널 모색의 또 다른 길은 자유주의적 중도정당인 민주당 내의 개혁 분파를 통해 기본소득이 있는 복지국가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기본소득의 의제화와 21세기 좌파 정당의 구성이라는 방향은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주요 구성원들이 기존 진보 운동 출신이라는 점에서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민주당을 통한 기본소득 실현은 낯선 일이었다. 한국 진보 운동의 주요 분파인 ‘민족해방파’(NL)의 경우 일찍부터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 노선에 따라 ‘비판적 지지’라는 구호를 내세우면서 자유주의적 개혁세력과 연합하는 전략을 추구했다. 반면에 진보 세력 내의 좌파는 ‘노동자, 민중의 독자 정치세력화’라는 목표 하에 이를 경원시했다. 따라서 기존 진보 세력 내의 좌파의 흐름 속에 있는 기본소득 운동이 자유주의적 개혁세력과 연합하고자 한 것은 새로운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민주당의 개혁세력과의 연합은 처음에는 조심스럽고 비공식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대개 정책 입안과 자문 방식이었다. 우선 2010년 지방선거에서 경기도 교육감 후보로 나선 김상곤에게 무상 급식을 자문한 게 강남훈이었다. 이후 강남훈은 이재명 성남시장에게 청년배당을 자문하게 된다(오준호, 2019).

2) 2016년이라는 분기점

2016년은 한국 기본소득 운동에서 주요한 분기점으로 기록될 수 있을 만큼 기본소득 의제의 확산에 기여할 여러 사건이 벌어진 해이다.

첫 번째로 제16차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대회(BIEN Congress)가 7월에 서울에서 열렸다. 2014년 여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제15차 대회에서 서울이 다음 대회 개최지로 결정된 이후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는 대회 준비를 위해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했고, 또 이 과정에서 역량이 강화되기도 했다. 조직 내적으로는 그동안 쌓아온 연구와 집행 능력을 모아내고 발휘했으며, 국내의 다양한 개인과 집단 들이 대회에 참가할 수 있게 하는 연대 활동을 강화했다. 국제적으로 보면 아시아에서 최초로 열린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대회였기에 호기심과 연대 의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참가했다. 또한 대회 주제를 ‘사회적, 생태적 전환과 기본소득’으로 잡은 것은 기본소득이 좁은 의미의 소득 보장 정책에 머무는 게 아니라 더 커다란 변화의 주요 요소이자 촉매라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열린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대회는 국내에서 제법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당시 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이던 김종인이 기본소득의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자발적으로 대회에 참가해서 축사를 하기도 했다는 것은 주류 정치권에서도 기본소득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증거였다.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대회로 가는 과정에 벌어진 여러 사건도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우선 그해 3월 알파고(AlphaGo)와 한국의 바둑기사 이세돌의 대국이 서울에서 열렸다. 이 대국의 결과 기계가 지능에서도 인간을 넘어설 수 있으며, 이런 추세가 계속될 경우 인간 노동이 쓸모없어질 것이라는 대중적 공포(와 희망)가 커졌다. 이는 실리콘벨리의 유명인사들이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과 지지를 표명하는 것과 맞물려 기본소득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다음으로 핀란드 정부의 기본소득 실험 발표 및 스위스 기본소득 국민투표가 있었다. 2015년 총선으로 성립한 핀란드의 중앙당 주도 연립정부는 복지 체제 개혁의 일환으로 기본소득 실험을 한다고 발표했으며, 스위스에서는 6월에 기본소득 실시에 관한 국민투표가 있었다. 이것이 놀라웠던 것은 이른바 복지 선진국이라 할 수 있는 핀란드와 스위스 같은 나라에서 대안적인 복지제도로서의 기본소득에 관한 관심이 커졌다는 점이다. 이로써 기본소득이 유토피아나 엉뚱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현실성 있는 어떤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배경이 마련된 것이다.

끝으로 한국 현실에서 중요했던 것은 그해 가을 이재명 성남시장이 성남 청년배당이라는 이름으로 ‘부분’ 기본소득을 실시한 것이다. 성남 청년배당은 성남에 거주하는 24세 청년에게 연 100만 원을 지역화폐로 지급하는 것이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의 보건복지부가 청년배당을 실시할 경우 지방교부금을 삭감하겠다고 해서 원래 계획의 절반인 50만 원만 지급할 수 있었다(김교성 외, 2018). 성남 청년배당은 한 개 연령에 대해 소액을 지역화폐로 지급했다는 점에서 과연 기본소득이라고 할 만한 가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 하지만 지방자치단체가 가진 재정적 한계를 감안할 때 아무런 조건 없이 사실상 현금을 지급했다는 점에서 한국 복지 체제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일이었다. 더 나아가 정치적 의지와 대중적 지지가 있을 경우 기본소득과 같은 새로운 정책을 실시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는 의의가 있다. 마지막으로 전국적인 차원에서 기본소득이 실시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지방정부 차원의 기본소득 실시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차원의 기본소득 실시를 위한 일종의 파일럿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도 보여주었다.

3) 2017년 대통령 선거 전후

2016년은 한국의 기본소득 운동뿐만 아니라 한국 정치사에도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그해 가을 박근혜 정부의 무능, 부패, 거짓에 항의하는 시민의 저항운동이 시작되었고 이는 다음해 3월 헌정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졌다. 이에 따라 조기에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소득 주도 성장’을 공약으로 내건 민주당의 문재인 후보가 당선되었다.

헌정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 이후에 실시된 선거였기에 야당인 민주당의 후보가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점은 누구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따라서 민주당 내의 후보 경선에 더 큰 관심이 쏠렸는데, 여기서 기본소득이 주요한 쟁점의 하나가 되었고, 그 중심에 이재명 성남시장이 있었다. 그는 박근혜 정부에 대한 저항과 탄핵 과정에서 강경한 태도를 취하면서 대중적 인기를 얻으면서 전국적 인지도가 있는 정치가로 부상했고, 민주당 경선에 참여했다. 이미 성남 청년배당으로 기본소득의 대명사가 된 이재명 성남시장이 민주당 경선에 참여하면서 기본소득 의제가 쟁점이 될 수 있었다. 물론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후보가 부상한 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전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가 퇴조하는 듯이 보였고 대신 ‘임금주도 성장’이 힘을 얻는 정세였던 것도 기본소득 같은 새로운 분배 방식에 관한 관심을 늘어난 배경이다. 한국의 경우에는 무상 급식으로 드러난 복지국가에 대한 대중의 열망 그리고 ‘청년 문제’라는 말로 표현된 취업난을 비롯한 청년 세대의 어려움 등이 그 배경을 이룬다.

민주당 경선에 나선 이재명 후보는 기본소득제라는 이름으로 6배당 + 1토지배당을 제안했다. 여섯 가지 배당은 0~12세 대상 아동배당, 13~18세 대상 청소년배당, 19~29세 대상 청년배당, 65세 이상 대상 노인배당 등의 생애주기별 배당을 비롯하여 장애인과 농민 대상의 특수배당(중복 가능)으로 각각 연 100만 원씩 지급된다. 토지배당은 국토보유세를 신설하여 재원을 마련해서 모든 국민에게 연 30만 원씩을 지급하는 것이다. 또 다른 민주당 경선 후보인 박원순 서울시장은 ‘한국형 기본소득’이라는 이름으로 아동수당, 청년수당, 중장년층에 대한 실업부조와 상병수당, 노인수당 등을 제시했다. 정의당의 심상정 후보도 기본소득제 도입을 지지했으나 실제로 제시한 공약은 박원순 시장과 유사하게 아동, 청년, 노인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민주당 내의 선두주자인 문재인 후보는 기본소득이라는 이름을 피하면서 아동수당, 미취업 청년을 대상으로 하는 지원, 노인연금의 확대 등을 공약을 제시했다.

여러 후보가 기본소득이라는 사용한 것은 두 가지 맥락이 있었다. 하나는 당연하게도 기본소득이라는 기표가 당시 발휘한 영향력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2016년을 거치면서 기본소득이 (반대도 적지 않았지만) 강력한 의제로 등장했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조건 없는 소득 보장의 필요성이 그만큼 커졌기 때문이다. 이는 노인 빈곤 문제 및 ‘청년 문제’로 인해 제기되었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대부분의 복지국가에 있는 아동수당을 비롯한 보편 수당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추구를 기본소득이라는 이름으로 대신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기본소득이라고 볼 수 없은 정책까지도 기본소득이라는 이름으로 경쟁적으로 제시되다 보니 무엇이 기본소득인가라는 논쟁이 잠시 벌어지기도 했다. 이는 기본소득에 반대하면서 전통적인 복지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이 구성한 프레임으로, 여러 정치가들이 기본소득이라는 이름으로 제시한 정책이 과연 진짜 기본소득인가 아닌가라는 논쟁이다. 당시 국면에서 이것이 불가피한 논쟁이라 할지라도 이 논쟁은 더 의미 있는 논쟁을 가리는 것에 불과했다. 더 의미 있는 논쟁은 복지정치의 당면 과제가 무엇인가였다(안효상, 2017).

한국에서 기본소득 논쟁은 좌우파 사이에서 벌어진 게 아니라 주로 ‘복지국가’ 진영이라 불린 곳과 기본소득 지지자 사이에서 벌어졌다. 복지국가 진영은 대개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을 모델로 해서 공적 서비스의 확대와 강화 그리고 사회수당의 도입 및 확대가 우선적 과제라고 주장하면서 기본소득에 반대했다. 물론 기본소득에 대한 ‘표준적인 반대’라 할 수 있는 호혜성, 재원, 노동유인 등도 반대의 논거로 제시했다.9

하지만 2017년 대선에서 소득 주도 성장을 내건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서 기본소득 및 기본소득 논쟁도 주변화되었다.

4. 착근(着根)

1) 현실 속의 기본소득

2018년 6월 지방선거에서 이재명 성남시장이 한국에서 가장 큰 광역자치단체인 경기도 지사로 당선되면서 잠시 주변화되었던 기본소득이 다시 중심 의제로 부상했다. 이재명 지사는 2019년 4월부터 경기도 청년 기본소득을 실시했다. 이는 성남 청년배당과 마찬가지로 경기도 거주 24세 청년에게 연 100만 원을 지역화폐로 지급하는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그 효과나 과정에서 몇 가지 의미 있는 변화가 있었다. 우선 수급자 규모가 커졌다는 것이다. 성남 청년배당의 경우 수급 대상자가 약 1만 1천명이었으나 경기도 청년기본소득은 16만 명이 넘는다. 두 번째로 규모와 연관되어 있지만 지역화폐로 지급함으로써 지역 경제 활성화 및 소상공업자들의 지지 확보 등 긍정적 효과를 보였다. 셋째, 경기도 산하 경기연구원과 여러 기본소득 연구자들이 참여하여 청년 기본소득의 효과 등을 분석하는 작업이 함께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2017년 대통령 선거에 나선 여러 후보들이 자신들의 정책에 기본소득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과 비슷하게 일부 사회운동에서 소득보장 요구를 기본소득으로 호명하는 일이 생겼다. 대표적인 것인 농민 기본소득이다. 농민 기본소득에 대한 요구는 2020년 2월 농민운동가, 기독교 목사, 녹색 활동가 등으로 구성된 농민기본소득전국운동본부가 만들어지면서 본격화되었다.10

이에 반해 농민운동의 주류인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은 농민 기본소득이 아니라 농민수당을 주장했다. 정파적 차이를 제외하면, 농민 기본소득은 개별적 지급을, 농민수당은 가구별 지급을 한다는 차이가 있다. 한편 농민기본소득전국운동본부는 농민 기본소득을 전국민 기본소득으로 가는 디딤돌로 본다는 점에서도 농민 기본소득과 농민수당의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두 제안 모두 농민에 대한 (무조건적) 소득 보장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이었다. 농민 기본소득(과 농민수당)이 제기된 배경은 도시 근로자 평균소득과 농가 평균소득의 격차, 농업의 공익적 성격에 대한 인식 제고, 기본 농업직불금 제도의 문제점 등 세 가지이다. 우선 평균소득의 차이는 199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크게 벌어져 2018년 기준 농가 평균소득은 도시 가구 평균소득의 65.5퍼센트에 그치고 있다. 하지만 두 번째로 오늘날 농업은 식량 생산 이외에도 다양한 공익적 가치가 있다고 인정받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환경적 기능(홍수 방지, 수자원 보호, 토양 보전, 생물다양성 유지 등)이다. 따라서 이런 가치를 유지하는 농민 혹은 농촌 주민에 대한 보상이 필요하다. 세 번째로 농가 소득을 안정화하는 직불금 제도가 있으나 쌀 농사에 편중되어 있고, 토지 면적에 따라 지급함으로써 소득 역진성이 생긴다는 문제가 있다. (이런 문제점 때문에 2020년부터 일정 소득 이하의 농가에 고정 소득, 즉 연간 120만 원을 지급하는 ‘공익형 직불금’이 시행되었다. 하지만 액수가 작고, 여전히 면적에 비례하는 직불금의 비중이 크다는 문제점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무조건성과 보편성을 주요 원칙으로 하는 기본소득이 영감을 주어 농민 기본소득(과 농민수당)이 제기되었고, 여러 지방자치단체에서 주로 농민수당이라는 이름으로 시행에 들어갔다. 2020년 9월을 기준으로 전남, 전북, 충남의 50여 개 시군에서 시행되고 있으며, 더 많은 지방자치단체가 준비 중에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경기도만이 농민에 대한 소득보장 정책에 농민 기본소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다른 지방자치단체의 농민수당과 달리 개별적으로 지급한다는 것이 하나이며, 농민에 대한 소득보장에 머무는 게 아니라 장기적으로 전국민 기본소득을 지향하는 점을 드러낸 것이 다른 하나이다(안효상 외, 2020).

2020년 벽두부터 시작된 코로나팬데믹으로 인한 방역위기와 경제위기로 기본소득은 다시 한 번 주목받게 되었고,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코로나팬데믹은 단기적으로는 경제 활동과 방역 사이의 상충으로, 장기적으로는 기존의 삶의 방식과 생태 위기 사이의 모순을 드러냈다. 따라서 기존의 복지 정책과 소득 보장 방식의 부적절함 또한 드러냈다. 이럴 때 무조건적으로 사전에 소득을 보장하는 기본소득이 주목을 받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안효상, 서정희, 2020).

국제적으로 비상사태 기본소득(Emergency BI)에 대한 요구가 나오기 전인 2020년 2월 한국에서는 기본소득당과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운영위원인 윤형중이 각각 재난 기본소득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후 IT업계의 유명인이 여기에 가세하고, 청와대 국민청원을 하면서 재난 기본소득에 대한 요구가 커졌고, 여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시 문재인 정부는 소득 하위 70퍼센트에게만 지급하는 재난지원금을 구상하고 있었다. 여기에 재난 기본소득 요구가 나오면서 논의는 한국 복지정치 특유의 프레임인 ‘선별주의 대 보편주의’ 논쟁으로 확대되었다. 이때 논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선별 불가능성이며, 다른 하나는 모든 국민의 권리로서의 복지이다. 정부는 재난지원금 대상자를 선별하는 기준을 이리저리 마련해보려 했지만,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판명났다. 더구나 재난지원금처럼 신속하게 지급해야 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다. 이보다 더 중요하게 코로나팬데믹은 (차별적이긴 하지만)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모두의 희생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할 때 재난지원금은 시혜가 아니라 모두의 권리라는 점이 부각되었다. 크게 쟁점이 된 것은 아니지만 보편적으로 지급하고, 고소득층으로부터는 사후에 세금으로 환수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선별주의 대 보편주의 논쟁 속에서 결국 정부는 4월 총선을 앞두고 긴급재난지원금을 모두에게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가구 단위 지급으로 1인 가구 40만 원, 2인 가구 60만 원, 3인 가구 80만 원, 4인 이상 가구 100만 원이었다.

이에 반해 지방자치단체들은 재난 기본소득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면서 더 적극적으로 보편적 소득 지원 정책을 펼쳤다. 울산시 울주군은 3월 말에 가장 먼저 ‘보편적 긴급 군민 지원금’을 모든 군민에게 1인당 10만 원씩 지급하겠다고 발표했고, 곧이어 부산시 기장군이 ‘기장형 재난 기본소득’을 지급하겠다고 나섰다. 재난 ‘기본소득’이 탄력을 받은 것은 한국에서 가장 큰 광역자치단체인 경기도가 모든 도민에게 10만 원의 재난 기본소득을 지급하겠다고 나서면서였다. 이후 전국 17개 광역자치단체 가운데 8곳, 전국 226개 기초자치단체 가운데 136곳이 (명칭은 조금씩 다르지만) 재난 기본소득을 지급하게 된다(서정희 외, 2022).

2) 보편적 기본소득의 가능성

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한국은 보편적 기본소득을 실시하는 첫 번째 나라가 될 것인가?”라는 희망 섞인 질문은 서로 다른 시간대를 가지는 구조 변동과 주체적 노력이 특정 시점에서 교차하면서 나올 수 있었다. 불평등의 심화, 보편적 복지국가에 대한 대중의 요구, 새로운 대안으로서의 기본소득의 수용 및 확산을 위한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의 노력, 기본소득을 진지하게 수용한 정치가의 존재, 2016년 이후의 정치적 변동, 몇 가지 기본소득 및 기본소득 유사 정책의 실시 등이 2022년 대통령 선거라는 하나의 시점으로 수렴한 것이다.

대통령 선거라는 하나의 시점으로 수렴했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비개혁적) 개혁 정치의 과제의 하나로서 기본소득의 실현은 최소한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가능하다. 하나는 이른바 전략적 행위자들이 기본소득의 가치를 진지하게 수용하고, 현실성 있는 정책으로 입안해야 한다. 다른 하나는 대중이 심리적 장벽을 넘어 기본소득 정책을 어느 정도는 수용해야 한다.

한국에서 기본소득 운동이 확대되고 기본소득 의제가 확산된 데는 다른 여러 가지 요인도 있지만 이재명이라는 정치가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인권 변호사 출신인 이재명은 2010년 성남 시장으로 선출된 이후 새로운 진보적인 정책을 모색했고, 그 가운데 하나가 기본소득이었다. 그가 기본소득을 수용한 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있었는데, 하나는 진보의 주류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기본소득에 대한 편견이 없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와 연결되는 인적 연결망이 있었다는 것이다.

기본소득 의제의 확산에서 이재명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지방자치단체장이었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이었다면 기본소득 정책안을 입안하고 선전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하지 못했겠지만 단체장이었기 때문에 소박한 수준에서라도 기본소득이라는 명칭이 붙은 정책을 실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금민 외, 2021).

이는 기본소득의 경험을 통한 기본소득에 대한 대중의 인식 및 지지 확대라는 문제로 이어진다. 기본소득은 한 번도 제대로 실시된 적이 없는 제도일 뿐만 아니라 그 전제 자체가 노동-소유 패러다임과 충돌한다. 따라서 이런 대중의 심리적 저항을 넘어서는 일이 기본소득 실시에서 매우 중요하며, 그동안 기본소득 실험이 여러 지역에서 다양하게 실시된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청년 기본소득, 농민 기본소득, 재난 기본소득 등의 실시는 기본소득의 효과를 대중이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넓은 의미에서 ‘복지 경험’이 복지 확대의 디딤돌이자 복지 축소의 억제 요인이 된다는 관점에서 볼 때 기본소득의 경험도 기본소득에 관한 긍정적 인식을 심화, 확산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질 수 있게 한다. 실제로 경기도에서 2019년과 2020년 두 차례 실시한 공론화 조사에서 시민들이 숙의토론을 거칠 경우 보편적 복지, 복지를 위한 증세, 기본소득 같은 대안적 정책에 대한 지지가 상승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202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어느 수준에서이건) 보편적 기본소득 도입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도 2021년 8월 ‘한국 사회 전환: 리얼리스트들의 기본소득 로드맵’을 발표하여 적절한 방향성을 제시하려 했다. 로드맵은 모두에게 월 30만 원을 지급하는 부분 기본소득(Partial BI)에서 시작해서 십 년 안에 (현재 수준에서 중위소득의 50퍼센트인) 월 90만 원을 지급하는 완전 기본소득(Full BI)으로 나아가는 계획을 제시한다. 또한 기본소득의 도입은 공공복지의 강화 및 확대와 함께 가는 것으로 설계되어 있다.11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선 이재명도 당연히 기본소득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그는 모든 국민에게 연 100만 원, 청년에게는 연 200만 원의 부분 기본소득을 실시하겠다고 했으며, 향후 월 50만 원의 기본소득을 목표로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선거 과정에서 이재명 후보의 기본소득은 뒷전으로 밀리게 된다. 한 가지 이유는 기본소득이 급진적 의제이기 때문에 중도 확장을 위해 전면에 내세우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이재명 선거 캠프 내에도 기본소득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편에서는 “한국은 보편적 기본소득을 실시하는 첫 번째 나라가 될 것인가?”라는 질문이, 다른 한편에서는 이재명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기본소득이 제대로 실현될 수 있는가라는 의구심이 공존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게다가 선거 캠프 내의 이런 지형도는 사실 한국 사회 내의 전략적 행위자의 지형도를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설사 이재명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 하더라도 경제관료를 비롯한 보수적인 관료들의 저항, 정치권의 반대, 보수 언론의 공격, 경제계의 반대 등을 물리쳐야 기본소득이 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재명 후보의 당선을 통해 기본소득 실현의 전망을 가졌던 사람들조차 기본소득 실시가 좀 더 장기적인 과제가 될 것임을 예감했다. 하지만 이런 예감조차 의미 없는 일이 되었다. 대통령 선거에서 이재명 후보는 국민의힘 윤석렬 후보에게 0.73퍼센트 차이로 패배했다.

5. 미망(迷妄) 혹은 미망(彌望): 맺음말을 대신하여

2022년 대통령 선거 결과 한국에서 기본소득의 밀물은 지나갔다. 하지만 “썰물은 그 이전의 밀물이 가져왔던 것을 결코 모조리 가져가지는 않는다”는 페르낭 브로델의 말처럼 갯벌 여기저기에 흔적을 남긴다. 부정적이건 긍정적이건.

먼저 기본소득 실현을 위해 민주당의 개혁 세력과 연합한다는 전략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특정 인격에 과도하게 의존하게 된 상황은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현대 정치에서 인격에 기대는 것이 불가피한 일이긴 하지만 해당 의제의 정치적, 사회적 기반을 넓고 단단하게 만들지 못한 것은 큰 문제이다.

이는 ‘기본소득 동맹’의 형성이라는 과제를 제기한다. 한국의 정치 지형에서 이 동맹은 두 개의 결절점(node)을 통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하나는 민주당 자체를 좀 더 진보적인 방향으로 개혁하는 것을 통해 중도개혁 세력 내에서 기본소득의 기반을 확보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민주당보다 왼쪽에서 기본소득을 당면 과제로 삼는 새로운 진보 세력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기본소득 동맹 형성의 문제는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가 초기에 추진했던 두 방향, 즉 자유주의 개혁세력과의 연합 그리고 21세기 좌파 정당의 건설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차이가 있을 것인데, 정치적, 대중적 지형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는 2022년 대통령 선거 결과 및 그 이후의 정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사실 2022년 대통령 선거는 민주당 후보가 ‘지기 힘든’ 선거였다. 2016년의 정치적 격변은 한국 보수 세력의 민낯을 드러냈으며, 대중의 요구도 전반적인 정치 개혁을 원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2022년 선거에서 민주개혁 세력을 대표한다고 하는 집권여당인 민주당 후보가, 비록 아슬아슬한 차이이긴 하지만, 패배했다. 단기적으로 볼 때 패배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는 것은 잘못된 부동산 정책(?)으로 인한 집값 상승과 이른바 ‘조국 사태’로 불거진 민주개혁 세력의 도덕적 위선에 대한 반감이다. 그러나 이런 단기적인 효과는 좀 더 장기적인 주체화 효과 없이는 발휘되지 않았을 것이다. 장기적인 주체화 효과란 신자유주의적 주체의 형성이라고 볼 수 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개인의 자유를 공공성과 대립하는 것으로 보며, 무한 경쟁 속에서 사적인 이익의 추구가 정당하고 바람직하다고 보는 신자유주의적 주체가 형성되었고, 사회의 밑바탕에 깔린 정서가 되었다. 여기에 더해 대통령 탄핵을 거치면서, 특히 정치적 원한에 기초한 정치적 부족주의가 더해지고, 기존의 보수 언론, 관료, 지식인 사회가 지속되고 있다. 이 속에서 2016년 이후 정치적으로 궤멸할 것처럼 보였던 반공 보수세력이 극적으로 부활했다. 이런 이념적, 정치적 지형에서 당장 기본소득 동맹이 넓고 단단하게 형성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런 점에서 기본소득의 밀물은 분명 지나갔고, 돌이켜 보면 미망이었다.

그럼에도 기본소득의 부상을 가져온 당대의 위기는 여전히 진행 중이기에 기본소득의 또 다른 부상은 또 다른 계기만을 필요로 할 것이다. 물론 그 계기는 주체의 형성 속에서만 의미가 있을 것인데, 기본소득 아이디어의 가치가 그 의미를 형성할 수 있다.

한국 기본소득 운동의 고유한 점 가운데 한 가지는 기본소득의 정당성과 원천을 공유부(common wealth)에서 찾는다는 것이다. 공유부는 모든 인류에게 주어졌거나(자연적 공유부), 함께 만들고 물려받은 것으로(인공적 공유부) 모두에게 공통적인 것이다. 따라서 모두는 공유부에 대한 몫이 있는데, 이를 분배할 경우 모두에게 무조건적으로 개별적으로 분배하는 것 이외에 다른 정당한 방법은 없다(금민, 2020).

기본소득의 정당성과 원천을 공유부에서 찾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기본소득을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기본소득이 좁은 의미의 소득보장을 넘어서서 정치공동체 구성원들의 공통성을 드러냄으로써 새로운 민주주의, 즉 공유자 민주주의를 지향하게 한다는 것이다.

공유자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형해화된 오늘날의 포스트민주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대안이다. 공유자 민주주의는 기본소득이라는 형태로 정치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일정한 수준의 경제적 보장을 함으로써 실질적으로 동등한 지위를 유지하고, 정치적 참여를 비롯한 여러 사회적 참여를 가능케 할 것이다.

기본소득의 실시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공유자 민주주의로의 전환이 진공 속에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주요한 도전은 기후위기와 생태위기를 넘어서는 생태적 전환이다. 물론 이때 생태적 전환은 사회적 전환과 함께 이루어져 한다.

기본소득 지지자들에게도 생태적 전환은 주요한 도전이다. 기본소득이 생태적, 사회적 전환을 가능케 하는 주요 요소로서 어떻게 기능할 수 있는가? 그 가운데 하나가 탄소세-탄소배당이다. 시장 메커니즘을 통해 에너지 체제의 전환을 추동할 경우 화석연료에 대한 탄소세 부과는 유력한 수단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불평등이 발생할 것인데, 이를 완화하는 방법이 기본소득 원리에 따른 탄소배당이다. 더 나아가 생태적, 사회적 전환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의 참여가 필수적이라 할 때 보편적 기본소득의 필요성은 더 커진다(독일 금융과세시민연합 외, 2023).

이렇게 기본소득은 그 어느 때보다 의미 있는 정책이자 가치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현재 한국 (그리고 세계) 상황은 기본소득에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 생태적, 사회적 전환 그리고 기본소득에 대한 대중적 인식과 지지가 크고 넓지 않다. 도리어 정치적 부족주의, 희생양을 찾는 우파 포퓰리즘, 신자유주의적 개인주의의 정체성 등이 널리 퍼져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가 향후 기본소득 운동 그리고 사회적, 생태적 전환을 추구하는 모든 노력의 과제가 될 것이다.

비개혁적 개혁 정치의 추구는 87년 체제의 성립 및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속에서 분명 의미 있는 방향 전환이었고, 특히 여기서 기본소득은 현실을 개선하면서도 그 너머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핵심 의제였다. 게다가 대통령에게 상당한 권한이 있는 제도를 가진 한국 정치의 특성을 감안할 때 유력한 정치가와 동맹을 맺는 개혁 정치는 성공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 하지만 혁명보다 개혁이 더 어렵다는 말을 실감하듯이 제도를 통한 전환은 대중적 기반이 크고 넓지 않을 때 실패할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한국의 기본소득 운동의 궤적은 이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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