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병상 : 인천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폐암이라니. 평생 담배를 피우지 않았고 학교와 집이 아니라면 산과 들에서 시간 대부분을 보냈을 텐데, 어떻게 그런 확률이 스밀 리 있나. 담배 피우지 않은 이의 폐는 치유될 가능성이 높다는 풍문을 들었고, 과연! 명쾌한 목소리를 찾은 모습을 확인한 뒤에도 다시 차일피일했는데, 별세 소식을 듣고 말았다.

직계 후배들은 한결같이 “놀부”라고 했다. 제물포고등학교 생물반의 신입 후배에게 자신의 전공을 소개하던 선배와 서울대학교 임학과 실습장을 방문했는데, 선배는 귀엣말로 놀부라 귀띔했다. 기대하는 후배를 술과 놀이로 안내할 수 없는 법. 강도 높은 현장 조사 연구팀에 넣은 모양이었다. 혀를 내두르던 선배들은 대부분 교수가 되었으니, 나중에 이경재 교수도 뿌듯해한 별명, “농부”는 고마움의 당시 표시였을 게 틀림없다.

생물학을 전공해 교수가 되려던 청년은 생물학과를 막 개설한 인하대학교에 입학했다. 1회인 만큼 우선권이 있으리라 기대했다. 현미경 몇 대에서 시작한 생물학과로 부임한 지도교수는 “무에서 유를 만들자!” 하면서 석사와 박사학위까지 1회로 독려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청춘을 바쳤는데, 거기까지였다. 교수로 자리 잡는다는 거, 인간관계가 중요하다는 진리를 새파란 학자는 깨닫지 못했다. 지도교수 추천서를 요구하지 않는 연구소에 지원했을 때, 이경재 교수가 떠올랐다. 까마득한 후배를 기억한 걸까? 흔쾌히 추천사를 써주었고, 실패하자 기꺼이 손을 내밀어주었다.

계통분류학은 값비싼 기계와 시약이 필수인데, 현장을 중시하는 생태학은 달랐다. 씨줄 날줄로 얽힌 생태계를 현장에서 파악해야 했는데, 실험실에서 유전자를 분석하던 신출내기는 서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경재 교수는 까마득한 후배에게 놀부가 아니었다. 과제를 얹어주며 의견을 구했을 뿐 아니라 국내외 연구 세미나의 동행을 허락했다. 덕분에 우리 생태계의 위기를 절감하게 되었다. 1990년대 초 태동한 환경단체는 탐욕스러운 개발로 허물어지는 생태계의 실태를 조사해달라는 부탁이 많았고, 기꺼이 참여한 이경재 교수의 배려로 새내기 학자는 인생의 새로운 구심점을 비로소 찾게 되었다.

인천에서 환경단체를 창설해 시민과 활동하면서 첫 상대가 굴업도 핵폐기장이었다. 버거웠다. 길고 힘겨웠어도 결국 물러나게 했다. 이어 영흥도의 대규모 화력발전소. 그 싸움은 아직 이어지지만, 생물학 서생은 생명공학에 주목해야 했고 점점 교묘해지는 만큼 골치 아프다. 막대한 자본이 추진하면 터무니없는 논리를 제공하며 아부하는 ‘청부과학’은 기괴할 뿐 아니라 집요하다. 핵공학과 생명공학이 그렇다. 미래세대에 파급될 영향을 생각한다면 외면할 수 없다. 방사성 물질 안의 핵이든, 세포 안의 핵이든, 일단 파괴되면 자연과 생태계의 안정이 무너진다. 미래세대는 전가될 파국을 감당하기 어렵다. 이공계 학자라면 열역학법칙을 위배하는 개발행위를 양해하면 안 된다. 양심이 동의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부딪히면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안쓰러웠을까? 이경재 교수는 자리 잡은 뒤 행동하길 은근히 권했지만, 발을 뺄 수 없었다. 발을 빼도 소용없는 일이기에, 절박하고 시급하기에, 논리보다 선동이 중요했다. 그런 후배를 걱정한 이경재 교수를 만나지 못했다면, 이 시간 어떤 인생을 걷고 있을까? 생태계 현장에서 위기를 체감하지 못했다면, 이경재 서재에 꽂힌 <녹색평론>을 펼치지 못했다면, 잘 나가던 황우석 전 교수를 부러워했을지 모르겠다. 생태계 파괴와 기후위기를 남 탓으로 여기며, 행동은 내 몫이 아니라고 여기지 않을까?

활짝 웃는 영정사진은 뒤늦게 찾은 후배를 나무라기는커녕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걷는 후배를 자랑스러워했다. 어느새 눈이 침침하고 행동이 느리지만, 행동을 멈추지 않으면서 공부하는 서생을 격려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벌써 그립고, 삶이 남을 때까지 그리울 테지만, 대선배 이경재 교수를 기억하며, 소신과 각오를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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